
‘전자블록(電子ブロック)’에 대해 들어보신 분들 중 대다수는 아마 모스 그린(Moss Green) 컬러의 반투명 블록을 사용하는 EX 시리즈와 FX 시리즈, 그리고 그 앞 세대인 ST 시리즈를 떠올리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제품들은 모두 18mm 플랫폼인 스켈레톤 블록(Skeleton Block, スケルトンブロック)에 기반한 제품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물론 60년대에 선보였던 DR 시리즈와 SR 시리즈도 있습니다만 우리나라에 계셨던 분들은 접해 볼 기회가 없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혹시 20세기가 저물어가던 시기에 30mm 플랫폼 기반의 새로운 전자블록 제품들이 등장했다는 것을 알고 계신가요?
18mm 플랫폼과 30mm 플랫폼 기반의 전자블록

머리글에서 언급했다시피, 우리에게 익숙한 전자블록은 블록의 폭과 너비가 18mm인 스켈레톤 블록입니다. 하지만 21세기 들어 전자블록기기제조주식회사(電子ブロック機器製造株式会社)에서 생산하고 있는 블록은 모두 새로운 규격인 30mm 플랫폼입니다. 위 사진의 블록 중에서 클리어 블루와 클리어 그린 색상의 블록이 바로 이 새로운 30mm 규격을 사용한 트랜지스터 블록입니다.
스켈레톤 블록의 18mm는 트랜지스터나 다이오드 같은 부품 소자 하나가 딱 맞게 들어가는 크기면서도 손으로 다루기에 적절한 크기였습니다. 초창기 모델인 DR 시리즈나 SR 시리즈의 15mm도 부품을 넣는데는 큰 어려움이 없었지만, 손으로 다루기에는 너무 작은 크기였기에 ST 시리즈부터 접점 방식을 탄성 스프링 방식으로 변경함과 동시에 크기를 18mm로 키웠던 것입니다. 사실 18mm도 그리 많이 차이나는 크기는 아니지만 중학생부터 성인을 대상으로 한 제품이었기에 너무 작지도 크지도 않은 적절한 크기였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자블록이라는 완구 브랜드가 1986년에 종료된 이후로 전자블록기기제조주식회사에서 새롭게 발매된 제품들은 학교에서 실습하기 위한 교구(敎具)로 정체성이 변화한 상태였습니다. 그렇기에 더 어린 학생들이 다루기에도 어려움이 없어야 했고, 작은 크기의 블록을 삼키거나 하는 문제도 막을 필요가 있었기에 블록의 크기를 30mm로 크게 키우고 탈착도 쉽게 개선한 것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블록의 형상도 18mm 크기를 기반으로 다양한 형태로 설계되었던 스켈레톤 블록과 달리 폭과 너비가 30mm인 1P 규격과 60mm인 4P 규격으로 간략화되었지만, 상대적으로 큰 규격 덕분에 단순 부품 소자 뿐만 아니라 회로 기판도 포함할 수 있는 규격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이어서 이 새로운 규격인 30mm 플랫폼 기반 제품들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전자블록 ST-100 기능재현모델

이 제품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번 다룬 바 있지만, 30mm 플랫폼 기반의 제품 중 일반 판매가 되었던 첫 번째 제품은 1997년 전자블록기기제조주식회사의 홈페이지 개설 기념 모델로서 750대 한정 생산 판매했던 ST-100 기능재현모델입니다. 이 모델에 기능재현모델이라는 명칭이 붙은 이유는 단순히 복각한 제품이 아닐 뿐더러, 플랫폼의 변화와 더불어 일부 회로는 사용된 부품의 특성 변화에 따라 약간의 수정이 가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1970년대에 생산되었던 ST-100 모델도 전자블록기기제조주식회사 단독 체계에서 발매되었던 초판과 갓켄(学研)과의 제휴 이후에 리브랜딩된 수정판의 회로나 제품 구성 방식이 일부 달랐다는 점을 상기해 보면, 회로가 일부 변경되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 50년 전 제품에 사용되었던 트랜지스터와 다이오드의 특성이 현 세대의 특성과 다르기 때문에 이러한 수정은 불가피했을 것입니다.
또한 이전 제품이 앰프의 사용 여부에 따라 앰프 자체를 분리1하거나 S-IP-2라는 플라스틱 차단 부품을 사용2해야 했던 것과는 달리 스위치 하나로 전원을 인가하는 동시에 앰프 사용 여부를 결정할 수 있도록 설계된 것도 눈여겨 볼만한 부분입니다. 또한 분실하기 쉬웠던 쥬라콘 클립(ジュラコンクリップ)을 사용해 두 개의 리드선을 묶었던 기존 제품과 달리 새로운 형태의 그립(S-GRIP)을 제공하는 것도 편의성 면에서 장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플랫폼이 변경되고 조작 편의성이 향상된 반면에 블록 구성은 기존 제품과 거의 동일합니다. 단지 플랫폼의 변화에 따라 블록의 분할 형태가 달라진 것이 눈에 띕니다. 10P 크기였던 S-ANT 블록의 크기가 8P로 줄어든 대신 기존 제품과의 접점 호환성을 위해 S-L 블록이 추가되었고, 2P 크기의 단일 블록이었던 S2P-T가 S-DT와 S-LT로 분할되었습니다. 그리고 200Ω 저항 블록인 SRT-200이 추가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제품은 750개 한정판인데다가 생산된지 30년이 다 되어 가기에 구하기 쉬운 제품은 아닙니다. 저 같은 경우 좋은 기회를 얻어 제품 두 세트를 확보할 수 있었고, 전자블록기기제조주식회사의 대표이사인 오시카(大鹿)씨가 제 컬렉션을 보고 놀랍다는 반응을 보여 주시기도 했습니다.
전자블록 NT-55

ST-100 기능재현모델은 처음 예약을 받을 때만 해도 100개 가량으로 충분할 것으로 예상했었으나, 실제로는 그 수를 훨씬 상회하는 예약이 몰렸습니다. 급히 추가 생산을 발주했으나 이 역시 역부족일 정도였고, 이에 따라 일반인 대상의 새로운 완구 모델을 기획하게 되는데, 2000년 11월에 발매된 이 모델이 바로 전자블록 NT-55입니다.
NT-55는 30mm 플랫폼이라는 점이 이전의 제품들과 차별되는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지만, 사실은 그 보다 더 큰 차이점이 있습니다. 이전 제품들은 모두 전용 케이스에 앰프, CdS, 미터기, 안테나, VR과 같은 구성 요소들이 고정적으로 장착되어 있는 형태였으나, NT-55는 블록이 삽입되는 공간인 블록 스페이스만 제공될 뿐, 그 외의 모든 구성 요소가 모두 블록 형태로 제공됩니다. 안테나, 동조기, 앰프, 스피커 뿐만 아니라 필수적으로 케이스에 포함되어 있어야 할 것 같은 전원 시스템마저 블록 형태로 제공됩니다.
예를 들면 배터리 케이스에 연결된 N-BAT 블록3을 통해 1.5V 직류 전원이 공급되며, 7805A 기반의 DC 레귤레이터가 포함된 N-DC 블록과 AC-DC 9V 어댑터를 통해 5V 직류 전원이 공급됩니다. 따라서 NT-55에서는 실험에 따라 1.5V, 3V, 5V와 같은 다양한 전원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외에도 TAMIYA의 3-SPEED CRANK AXLE GEARBOX4를 이용한 모터 및 간이 발전기 시스템인 N-MO 블록을 통해 손으로 크랭크에 연결된 손잡이를 돌려 전원을 공급하는 실험도 할 수 있습니다.
NT-55는 모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기본적으로 55개의 실험이 포함된 회로집을 제공하며, 별도로 판매되는 미가공 블록인 N-NC1P와 접점 파츠인 N-BSP를 활용하여 자신만의 블록을 제조하여 활용할 수도 있습니다.
NT-55 역시 두 개의 세트를 구입하여 실험에 활용하고 있는데, 그 중 한 세트의 DC 레귤레이터가 동작하지 않아 수리를 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습니다. 만약 문제 없이 마무리가 된다면 그 과정도 글로 적어 볼 예정입니다.
확장 파츠 UP-23

기존의 전자블록 제품들이 별도로 판매된 다양한 확장 파츠를 이용해 제품의 구성을 상위 제품으로 업그레이드하거나 새로운 블록을 추가할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NT-55도 2003년에 발매된 확장 파츠인 UP-23을 통해 다양한 종류의 실험을 추가할 수 있습니다.
UP-23의 추가 블록을 살펴보면 갓켄에서 발매되었던 EX-150 복각판의 확장 키트인 광실험60에서 새롭게 선보였던 블록과 유사한 블록들이 등장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멜로디 IC, 포토트랜지스터 등이 추가되어 있으며 이를 통해 23개의 새로운 실험을 할 수 있어, 두 개의 제품을 결합하면 기본적으로 78개의 회로를 구성해 볼 수 있습니다. 또한 NT-55의 블록 스페이스에 UP-23의 블록 스페이스를 직접 연결할 수 있어 블록 스페이스를 확장할 수도 있습니다.
패키지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전자블록의 정체성이 교구로 변화하고 있던 상황에서 등장한 30mm 플랫폼은 패키지의 형태도 교구 스타일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패키지는 파손되기 쉬운 종이 박스나 화려한 디자인 대신 학교의 실험실 보관함에서 흔히 볼 법한 목재 박스 형태로 제작되어 있습니다. 얼핏 지나가면서 보면 이게 전자블록인지 알아채는 것조차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회로집 역시 마치 워드프로세서로 작성한 후 프린트하고 제본한 느낌의 간결함을 보여 줍니다. 참고로 사진은 따로 찍지 않았지만 UP-23의 케이스는 다이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A4 크기의 플라스틱 서류 케이스입니다.
이러한 패키지 구성은 다른 교구 기반의 제품과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한 선택으로 보이지만, 기존의 전자블록 제품을 기억하던 사람들에게는 어쩔 수 없는 위화감을 줍니다. 갓켄의 전자블록 EX-150 복각판 이후 등장한 일련의 제품들이 기존의 디자인 언어를 기반으로 21세기에 맞는 세련된 모습으로 다시 탄생한 것과는 달리, 일반인들에게는 그 매력이 덜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갓켄이 EX-150 복각판을 대히트시킨 것에 비해, 아쉽게도 시장에서 전자블록 NT-55의 반향은 상대적으로 적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 두 제품이 등장한 지도 벌써 20년도 넘은 지금은 이 제품이 집에 보관되어 있는데 이 제품이 어떤 제품인지 무엇을 하는 제품인지 이해하지도 못하고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는 세대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어렵게 다시 일어난 두 번째 파도(Second Wave) 역시 이제 잠잠해지고, 전자블록을 만들어 냈던 주역들이 떠나면서 진짜 황혼을 보내고 있는 느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동시에 이 흥미롭고 재미있는 도구들에 대해 여전히 관심을 가지고 즐기는 사람들을 여기저기서 만나볼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안도감과 행복을 느끼고 있기도 합니다. 여러분도 기회가 되신다면 어떤 제품이든 좋으니 구해서 한 번 즐겨 보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궁금하신 점은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제가 알고 있는 내용이라면 최대한 자세하게 답변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