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글에서는 전자블록 FX-마이컴 R-165의 영국 수출판인 FX-COMPUTER의 구성과 일본 내수판과의 차이를 간단하게 살펴보았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동일한 제품임에도 불구하고 지역과 시대 환경에 따라 사용자들이 바라보는 관점과 정체성이 전자블록 그리고 마이크로컴퓨터(Microcomputer)라는 완전히 다른 형태로 갈라진 이유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FX-COMPUTER는 패키지와 매뉴얼이 영어로 바뀌었다는 점을 제외하면 일본에서 판매된 FX-마이컴 R-165와 사실상 동일한 제품입니다. 하지만 관련 자료를 찾아보면서 흥미롭게 느낀 것은 제품 자체의 차이가 아니라 이 제품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였습니다.
일본에서 전자블록(電子ブロック)은 이름 그대로 전자회로를 구성하고 실험하기 위한 제품으로 출발했습니다. 전자 부품 소자를 하나하나 블록 안에 넣고 이들을 자유롭게 배치하여 회로를 구성하는 것이 전자블록이라는 제품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었습니다. 초기의 DR, SR 시리즈를 거쳐 ST와 EX 시리즈로 발전하는 과정에서도 이러한 기본적인 개념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제품에 포함되는 부품과 만들 수 있는 회로의 수는 크게 늘어났지만, 기본적으로는 전자회로를 구성하는 도구였습니다.
그리고 FX-SYSTEM 역시 이러한 흐름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FX-SYSTEM에서는 이전의 EX 시리즈보다 블록을 배치할 수 있는 공간이 크게 늘어났고, 여러 전자부품을 본체에 내장하는 등의 변화가 이루어졌습니다. 여기에 마이크로컴퓨터, 신시사이저, 멜로디 IC, 클럭과 같은 당시의 새로운 전자 기술을 접목하면서 기존 전자블록의 영역을 확장하려고 했습니다. 따라서 일본에서 FX-마이컴 R-165를 바라보면 자연스럽게 전자블록에 마이크로컴퓨터가 추가된 제품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하지만 영국을 비롯한 서양권의 자료를 찾아보면 조금 다른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전자블록이 아니라 FX-COMPUTER
우선 이름부터 다릅니다.
일본에서는 제품명이 갓켄전자블록 FX-SYSTEM FX-마이컴 R-165(学研電子ブロック FX-SYSTEM FX-マイコン R-165)였지만 영국에서는 단순히 FX-COMPUTER라는 이름으로 판매되었습니다.
지난 글에서도 이야기했듯이 패키지 어디에서도 ‘전자블록(電子ブロック, Electronic Block)’이라는 브랜드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습니다. EX 시리즈의 해외판은 E・X・KIT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면서도 내부적으로는 Electronic Block이라는 브랜드가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FX 시리즈로 넘어오면서는 제품의 이름 자체에 COMPUTER를 강조한 FX-COMPUTER를 사용했습니다.

당시 영국의 전자 잡지에 실린 소개와 광고에서도 이러한 관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Hobby Electronics 1983년 8월호에서는 FX-COMPUTER를 일본에서 만들어진 조립식 전자·컴퓨팅 교육 키트로 소개했습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함께 소개된 EX 시리즈는 FX-COMPUTER와 같은 원리를 사용하는 보다 작고 단순한 전자 조립 킷(Electronics Construction Kit)으로 구분했다는 점입니다. FX-COMPUTER에는 65개의 전자회로 실험을 수록한 매뉴얼과 별도로 100개의 컴퓨터 프로그램을 수록한 더 큰 매뉴얼이 제공된다는 점도 강조했습니다.
당시 광고의 표현은 더욱 직접적입니다. FX-COMPUTER를 컴퓨터와 전자공학을 공부하고 이해하기 위한 입문용 제품으로 소개하면서, 매뉴얼을 따라가면 직접 프로그램을 작성하고 실행하면서 컴퓨터가 어떻게 동작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같은 제품을 두고 일본에서는 전자블록 → FX-SYSTEM → 마이크로컴퓨터라는 방향으로 바라봤다면, 영국에서는 오히려 마이크로컴퓨터 → 전자회로도 구성할 수 있는 교육용 시스템이라는 반대 방향으로 바라볼 여지가 생긴 것입니다.
이미 피어난 마이크로컴퓨터 시대
여기에는 FX-COMPUTER가 판매된 시기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FX-마이컴이 등장했던 1980년대 초는 개인용 컴퓨터가 빠르게 보급되기 시작하던 시기였습니다. 특히 영국에서는 Sinclair ZX80과 ZX81, BBC Micro, ZX Spectrum을 비롯한 저렴한 가정용 컴퓨터가 등장하면서 컴퓨터가 더 이상 일부 전문가만을 위한 장비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더군다나 당시 영국의 소비자가 FX-COMPUTER를 처음 접했을 때 일본의 사용자처럼 DR, ST, EX에서 FX로 이어지는 전자블록의 역사를 알고 있을 이유는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전자블록의 새로운 모델’보다 ‘컴퓨터의 원리를 배울 수 있는 교육용 마이크로컴퓨터’라는 설명이 훨씬 이해하기 쉬웠을 것입니다.
실제로 Hobby Electronics가 1983년 10월호에서 FX-COMPUTER를 본격적으로 리뷰하면서 출발점으로 삼은 것도 마이크로컴퓨터입니다. 일반적인 마이크로컴퓨터가 보급되면서 스스로 컴퓨터를 배우는 것이 인기 있는 취미가 되었고, 이제 같은 접근 방법으로 전자공학까지 배울 수 있는 제품이 등장했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이것은 일본에서 전자블록이라는 제품의 발전 과정을 따라 FX-마이컴을 바라보는 것과 상당히 다른 시선입니다.
전자블록의 정체성은 점차 사라지고
이러한 차이는 미국에서 더욱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납니다.
미국의 Tandy/Radio Shack은 1985년 Science Fair Microcomputer Trainer라는 제품을 출시했습니다. 이 제품은 FX-마이컴에서 사용된 소프트웨어를 라이선스하고 TMS1100 기반 마이크로컴퓨터를 사용했지만, FX-SYSTEM의 가장 큰 특징이었던 전자블록 부분은 제거되었습니다. 현대에 이 제품을 조사한 자료에서도 Radio Shack이 FX-마이컴의 저가형 교육용 컴퓨터로서의 특징에 주목하고, 전자회로 실험기 부분을 제거하여 마이크로컴퓨터 교육에 집중한 제품으로 만들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상당히 흥미로운 선택입니다. Radio Shack의 Science Fair 브랜드는 원래 스프링 단자에 전선을 연결하여 여러 전자회로를 만드는 전자 실험 키트로도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FX-마이컴을 미국에 도입하면서는 오히려 전자회로 실험 부분을 버리고 마이크로컴퓨터만 남겼습니다. 일본의 관점에서 보면 전자블록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제거한 셈입니다.
하지만 이 제품을 마이크로컴퓨터 교육용 플랫폼으로 바라본다면 반대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전자블록은 마이크로컴퓨터의 입출력을 확장하는 독특한 방법이기는 하지만 제품의 핵심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전자블록이지만 그렇지 않은 FX-COMPUTER
문제는 FX-마이컴을 마이크로컴퓨터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이 제품의 위치가 상당히 애매해진다는 것입니다.
FX-마이컴이 사용하는 TMS1100은 4비트 마이크로컨트롤러입니다. 프로그램과 데이터를 입력하고 간단한 연산이나 입출력을 실험하면서 컴퓨터의 기본적인 동작 원리를 이해하기에는 충분하지만, 당시 이미 등장하고 있던 가정용 컴퓨터와 성능이나 활용성을 직접 비교할 수 있는 제품은 아닙니다.
반면 전자블록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마이크로컴퓨터의 입출력을 사용자가 직접 구성한 전자회로와 연결할 수 있고, 스위치나 LED, 스피커, CdS와 같은 다양한 부품을 프로그램과 결합할 수 있습니다. 현대의 시각으로 보더라도 단순한 4비트 컴퓨터라기보다 소프트웨어와 실제 전자회로를 함께 실험할 수 있는 작은 물리 컴퓨팅 플랫폼에 가까운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최근 FX-마이컴을 다시 다루는 해외의 레트로 컴퓨팅 관련 글에서도 흥미로운 부분은 TMS1100의 성능 자체보다 전자블록을 이용하여 마이크로컴퓨터의 입출력에 여러 회로를 연결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1980년대 초 당시에는 이러한 특징이 제품의 가장 큰 장점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마이크로컴퓨터로 바라보면 성능이 부족하고, 전자 실험기로 바라보면 EX 시리즈보다 전자블록 자체의 비중이 줄어들었습니다.
어쩌면 FX-마이컴은 전자블록과 마이크로컴퓨터의 경계에 너무 정확하게 걸쳐 있었기 때문에 어느 쪽에서도 확실한 위치를 차지하지 못했던 제품인지도 모릅니다.
같은 제품 그러나 다른 기억
현재 일본에서 FX-마이컴 R-165를 찾아보면 대부분 전자블록 FX-SYSTEM 플랫폼의 제품 중 하나로 소개됩니다.

반면 영어권에서 이 제품을 찾아보면 상당수의 자료가 전자블록보다 4비트 마이크로컴퓨터나 레트로 컴퓨터(Retro Computer)라는 관점에서 접근합니다. 특히 미국의 Science Fair Microcomputer Trainer와 연결되면서 이러한 경향은 더욱 강해집니다. 실제로 최근의 관련 자료 역시 이를 전자 키트와 마이크로컴퓨터 트레이너의 하이브리드 제품(Hybrid Electronics Kit and Microcomputer Trainer)이라고 설명합니다.
물론 이것만으로 서양 전체에서 전자블록을 마이크로컴퓨터로 인식했다고 일반화할 수는 없습니다. EX 시리즈와 여러 전자 실험 키트도 해외에서 판매되었고, 당시 영국 잡지 역시 FX-COMPUTER의 전자회로 실험 기능을 분명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다만 FX-COMPUTER라는 하나의 제품을 통해 같은 제품이라도 그것을 접하게 된 역사와 시장에 따라 전혀 다른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는 점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전자블록이 발전하여 마이크로컴퓨터를 품었습니다. 영국에서는 마이크로컴퓨터를 배우는 하나의 방법으로 전자블록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미국에서는 결국 전자블록을 떼어내고 마이크로컴퓨터만 남았습니다.
어쩌면 이 차이가 오늘날 일본에서는 FX-마이컴이 ‘전자블록’으로 기억되고, 서양의 레트로 컴퓨팅 커뮤니티에서는 ‘마이크로컴퓨터’로 다시 발견되는 이유일지도 모르겠습니다.